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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혜의 회화

 

참조물들의 회화와 창작의 알레고리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이탈리아의 트랜스아방가르드, 프랑스의 자유구상, 독일의 신표현주의와 통독 이후 라이프치히화파, 영미권의 뉴페인팅, 그리고 일본의 재팬팝(혹은 마이크로팝)은 형상미술의 다른 차원을 열었고, 그렇게 열린 차원은 현재진행형이다. 저마다 지향하는 이념이며 형식은 각양각색이지만, 예술의 정의는 물론 형식과 방법론마저 특정할 수 있다는 모더니즘패러다임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제기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 관념과 실천논리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하나로 통한다. 일반화하기는 그렇지만, 대개 회화적 사실 혹은 현실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도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회화에 의해 열린 사실, 회화에 의해 제안된 현실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 내통하면서 여전히 현실에 근거하지만, 그럼에도 더 이상 현실 그대로를 재현하지도 현실에 한정되지도 않는다. 여전히 현실을 참조하지만(그러므로 어쩜 현대회화는 이런 참조물들의 회화로 정의할 수도 있을 것), 그럼에도 현실은 더 이상 회화적 현실의 준거가 되지 못한다. 그 관계는 역전되는데, 회화적 현실이 오히려 혹 간과했을지도 모를 현실, 억압적인 현실, 잠재적인 현실, 그러므로 어쩜 겉보기와는 다른 현실의 민낯을 드러내고 폭로하는 거울이 된다. 그 화법은 리얼리즘적이라기보다는 알레고리적이다. 참조하고 덧붙이면서, 우회적이고 에두르면서 실체를 파고든다. 그렇게 현대미술 특히 회화는 사적언어들의 각축장이 된다.

 국내에도 이런 작가들이 더러 있는 편이고, 박지혜 역시 그 경향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자기만의 독창적인 회화적 형식을 열어놓고 있다. 일러스트와 애니메이션, 웹툰과 만화(작가는 만화 세대고, 지금도 만화를 즐겨본다)와 같은 대중매체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하면서, 그렇게 흡수한 자양분(어쩜 참조물들)을 회화적 형식으로 부려놓는다. 사사로운 일상적 에피소드와 현실인식을, 순간적인 발상과 착상을, 혼미한 기억과 스쳐지나가는 생각을 믹서 시키면서 또 다른 현실, 어쩜 다중 복합적이고 중층화된 현실, 느슨한 현실에 가려진 긴박한 현실인식의 장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사고가 났다. 아스팔트 위에 현장보존과 사태수습을 위해 경찰이 스프레이로 그려놓은 그림이 선명한 걸로 보아 아마도 자동차에 사람이 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얼굴을 바닥을 향한 채 엎어져 있다. 그 곁을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 생각에 골몰하는 사람도 있다. 어딘가로 황급히 뛰어가는 커플이 있고, 그 와중에 키스하는 연인이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나무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고양이. 무슨 일인가를 목격한 것 같은, 얼굴에 피 칠갑을 한(?) 노랑머리 남자의 놀란 표정. 교통표지판과 경고등. 무의미한 패턴과 장식. 그리고 여기에 번쩍, 쿵, 슈욱 하는, 사건과 반응을 대신한 만화의 전형적인 표식들. 그리고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상황들.

 작가가 <출근길>에 목격한 장면들이다. 흔한 일이고 일어날 법한 일이다. 이 일 중 몇 장면은 실제로 저녁 뉴스 시간에 TV에 나올 것이다. 혹 누군가가 전송해온 SNS로 접한 정보일 수도 있겠고, 아님 그저 잡지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그 중에는 논리적 개연성이 있는 경우도 있고, 그저 우연한 장면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실제 유무를 따지는 것이나 일관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고 의미도 없다. 중요한 것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 마치 영화 스크린에서처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실제 현실이 되는 현실, 흡사 가상현실과도 같은 현실이 엄연한 현실로서 눈앞에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작가는 상황적으로 실제와 가상, 시간적으로 현재와 기억이 어떠한 경계도 없이 하나의 화면 속에 짜깁기되고 재구성되는 장면을 통해 현실의 축도를, 일상의 신풍속도를 그려 보인다.

 

 그렇게 편집되고 재구성된 현실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기법을 닮았다. 의식은 결코 순차적으로 흐르지도, 인과성을 따라 전개되지도 않는다. 의식은 다만 우연과 필연, 실제와 가상(아님 상상), 의식과 무의식이 끊임없이 상호 간섭하는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각들의 다발이며 무의미한(사실은 다만 무의미해 보일 뿐인)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을 부르고, 하나의 의식이 다른 의식을 불러들인다. 자동기술법이고 자유연상기법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면 그 생각과 생각, 의식과 의식 사이엔 어떤 논리적 개연성도 인과성도 없다. 그럼에도 현실이 간과하고 억압하고 은폐한 현실, 가히 집단체면 수준으로 부를 만큼 사람들의 의식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이미지의 정치학에 가려진 현실을 암시하고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그렇게 작가는 치열한 현실을 뚫고 작업실에 왔다. 작가에게 현실은 전쟁이고, 작업(워크그라운드)도 전쟁(배틀그라운드)이다. 마치 하나 달랑 남은 담배를 피울 것인가 아님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돛대). 그 순간에선 살 것인가 아님 죽을 것인가를 번민하는 햄릿의 비장감마저 감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창작의 포기>를 생각한다. 손을 잘라내고 싶고 발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낀다. 그리고 때로 자기연민에 사로잡힌다(내 슬픔을 봐). 그 와중에서도 작가에겐 연민을 나눌 친구가 있다. 그는 미술학원에서 조소수업을 위한 알바모델 일을 한다(조소 아르바이트). 그가 모델을 서고 있으면, 무슨 둥지로 착각을 했는지 비둘기가 머리에 날아와 앉는다. 혹 머리에 똥을 쌀지도 모를 일이라서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전전긍긍해 한다.

 

  작가에게 비둘기는 애증의 대상이다. 그것들은 마치 작가를 감시하는 불행의 사신 같다(스쿼드). 술 취해 널브러져 있으면 떼거리로 몰려와 구구 거리는데, 작가를 보호하려는 건지 아님 토한 걸 탐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구토의 숲). 그렇게 작가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포기와 재기를 오락가락하는데, 비둘기는 재기했을 때보다 포기했을 때면 어김없이 확인이라도 하는 양 곁을 지킨다. 이를테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장대비를 뚫고 그림을 잔뜩 실은 리어카를 끌고 보이지도 않는 길을 무작정 갈 때면 비둘기가 짐 위에 앉아 작가를 지켜본다(그림수거). 사실 새 눈은 얼핏 봐서 어디를 쳐다보는지, 뭘 보기나 하는 건지 잘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희한하게도 몸을 앞으로 쑥 내민 것이 영락없이 작가를 쳐다보는 것 같다. 작가를 향한 비둘기의 연민이 엿보이고, 비둘기에 대한 작가의 연민이 읽힌다. 개인적으로 연민이 예술가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이런 연민이 상호교감을 자아내고 공감을 얻는다.

 

 여기서 비둘기는 사실 작가의 분신이다. 작가의 불행을 감시하는 비둘기도 작가를 연민하는 비둘기도 모두 알고 보면 작가의 내면에서 불러낸 자신의 화신이다. 근육잉어(마치 근육을 키워야 해! 씩씩해 져야 해!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같은)도, 고양이 레오도 그렇다. 이런 분신이며 화신도 그렇지만, 작가의 모든 그림은 알레고리다. 혹은 알레고리적이다. 현실 속에서라면 비둘기가 머리 위에 내려 앉아 똥을 싸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가 않는다. 창작을 포기한다고 해서 손이나 발이 떨어져 나가지도 않는다. 더욱이 폭풍우를 뚫고 무슨 행상인처럼 그림을 리어카로 실어 나를 일도 없다. 창작의 알레고리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포기와 재기를 반복하고 번복하는 예술가의 태도에 대한 알레고리고, 번민의 알레고리다. 그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라기보다는 예술이 뭔지, 예술의 죽음이 공공연한 현실로 운운되는(그리고 예술이 자본에 잠식당한) 시대에 새삼 창작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묻는 자기강박의 알레고리다.

연민이 창작주체의 덕목이라면, 강박은 예술을 움직이는 힘이다. 작가는 그 덕목과 동력 모두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형식적으로 일러스트와 애니메이션, 웹툰과 만화의 회화적 성과를 자기화하면서, 그리고 여기에 현란한 원색 사용과 대비에 거침이 없는 현저하게 현대적인 색채감정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독창적인 회화적 형식을 얻고 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 특히 창작현실에 연유한 사사로운 일상적 에피소드와 현실인식을, 순간적인 발상과 착상을, 기억과 생각을 날실과 씨실 삼아 하나로 직조하면서 자기만의 서사를 짓는다. 그렇게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현실에 가려진 현실, 때로 웃기지도 않은 현실(그러므로 해학적인 현실), 어쩜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의 비전을 열어놓는다. (2019.4)

21세기 인간 리포트:

박지혜의 우울과 상실의 초상화

 

박옥생, 미술평론가,  갤러리포스 대표

 


 

1. 일상 읽기

 

 

  박지혜는 인간의 실존적인 삶의 모습들을 관찰한다.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인간 삶의 모습들을 작가는 마치 기자가 사건의 전황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처럼, 기사를 쓰듯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스냅사진의 잘 짜여진 구도와 같은 일상의 다시 읽기 작업에는 작가가 주인공이 되거나 작가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가족과 친구들은 하나의 스토리를 갖는 주인공이 된다. 작가의 화면들에는 인물과 풍경이 연극의 무대를 보는 듯 특정한 행위가 벌어지는 상황의 묘사가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의 인물들에게는 표정이 없다. 공허하고 우울한 현대인들의 슬픔들이 화면 가득 부유하고 산란하고 있다.

 

  작가가 읽어내는 현대 인간의 삶은 단편적이고 현실 자체를 뛰어넘는 정신적으로 승화되거나 강조된 풍경으로 다가온다. 근작에 보여주는 <꿈의 장면>, <목욕탕>,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날>과 같은 작품들은 핑크의 사용이 강조된 인물들과 나무, 풍경의 묘사는 인간 내면의 불안과 우울을 끄집어내기 위한 표현적 수단으로 보여진다. 화면을 분절시키고 구획시킴으로써, 그 사이에 습합되거나 남아있는 색 조각들의 편린들은 이 공간이 기억의 공간이거나 가상의 공간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 박지혜의 화면은 색선과 색면의 조각 맞춤에서 그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다. 마치 색의 조화와 범주를 실험하고 증명하고 있듯이, 색들은 다양한 명도와 채도의 간극을 드러내고 숨기고 가려지고 다시 덧칠해 지고 있다. 이들의 조합들에서 시뮤레이트 된 가상공간에서 경험하게 되는 색의 강조나 픽셀의 조합과 같은 흔적들을 경험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는 현실과 가상이 서로 침범하고 교합되어 시,공간이 교차되는 낯설고 이질적인 풍경을 보여주게 된다. 작가의 경험에서 출발한 외부세계의 단상들이 내밀한 내부세계로 침투함으로써 겪게 되는 인간 정신을 닮은 실존의 색이며 풍경인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화면은 70년대 이후 일었던 독일의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 新表現主義)의 일련선상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요르그 임멘도르프(Jorg Immendorff) 나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와 같은 이들 신표현주의자들은 인간현실에 관한 연약하고 모호한 인간 감정을 보여주며 도시사회의 현상들을 거칠지만 선명하고 명료한 색의 배열들로 구성한다. 도시 사회의 인간 단상들을 거칠고 분명하게 또는 우화적인 연극성을 동반한 작가의 작품에는 신표현주의의 특징들을 읽어 낼 수 있다.

작가가 강조하고 있는 강화되고 자유로운 분명한 색의 흔적들을 통해 인간 풍경들에 머무른 작가의 시선의 시점과 풍경에 닿은 뜨거운 응시의 감성이 사물들에 들러붙어 있음을 알게 된다. 외부 풍경에 맟닿은 작가의 내밀한 시선이 살아있는 유기체의 순간과 흐름으로 변환되고 있다. 그리고 드러나는 것은 극화(劇化)된 일상 속에 존재하는 인간 실존의 표정과, 음미되어 정화된 따뜻한 색의 온도로서 유기적으로 꿈을 꾸듯 사유하는 색 면의 공간이다.

 


 

2. 이방인에 관한 성찰(省察)

 

 

  작가의 화면에는 물질문명 속에서 소외된 인간에 관한 문학성이 강조된 이야기들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습관처럼 살아간다. 이러한 일상 속에서 문득 자신을 성찰할 때  우리는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우울하고 공허하고 슬픈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부조리한 실존적 존재인 인간 자체에 관하여 고민할 수밖에 없다. 유한의 죽음은 우리를 다시 내면으로 응시하게 되고 삶의 의미들을 재고하게 된다.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 <이방인>은 뫼르소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부조리한 인간 삶의 실존적 단상을 보여주고 있다. 양로원으로부터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통보를 받았음에도 죽음에 관한 현실적 슬픔보다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읖조리는 뫼르소는 공허하고 우울한 현대인의 감정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 낯설고 슬픈 인간 군상들의 표정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까뮈가 보여주는 주인공이 겪는 감정의 궤적들은 박지혜가 그리고 있는 불안, 행복, 일상, 가족, 자신의 모습들과 닮아 있다. 이는 모두 유한한 실존적 존재로서의 이방인에 관한 쓸쓸한 이야기들인 것이다. 고뇌하는 젊은 작가의 시선에 닿은 외부 세계는 다시 자신의 내부와 교류되고 있다. 그의 조형과 색이 공간과 시간의 교차로써 교류되는 것처럼, 작가의 시선과 사유는 내밀한 안과 외부의 감정과 정서들로 교차되고 있다. 이는 작가가 주목한 인간 부조리의 상황 그 자체가 객체로써 인식되고 다시 주체로서의 작가에게로 환원되고 재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낯선 이방인으로서의 객체, 타자를 그대로 직시하고 그 상황과 존재 가치를 긍정하고 절대적인 가치평가를 보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나의 상황과 나의 내면으로 끌고 들어와 그 의미를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가 말하고 있는 타자의 존재로써 주체가 존재하고, 타자가 관계함으로써 주체가 성립되는 안과 밖의 유기적인 관계와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작가에게 있어 타자로서의 환경과 외부의 삶은 거울과 같이 작가의 시선을 반추하고 투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작가 자신으로 향하는 성찰과, 유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대면하게 하는 비밀의 빗장과 같은 것으로 작용한다.

 

  이는 박지혜의 작품이 동시대미술이 고민하고 있는 조형의 문제, 내용의 문제 그리고 전기론적인 작가의 경험과 삶의 내용이 작품과의 관계설정에 유기적인 영향과 침투를 보여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작가가 삶에 관한 성숙된 응시와 성찰이 얻은 결과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품은 거칠지만 힘찬 색의 운용과 감동의 파장이 긴 문학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현대물질 문화 속에서 생명이라는 유기적인 인간의 실존성에 관한 고민과 성찰의 변주들을 앞으로 기대하고 싶다. (2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