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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생생함: 모든 것들이 날것으로 내보내어질 때

«Lepidoptera»(2021.7.9-8.8, FINCH ARTS)

콘노 유키(紺野優希)

 

  박지혜의 개인전 «Lepidoptera»를 방문한 사람들 중에서 “제대로 페인팅(회화)를 한다-하고 있다[1]”라는 소감이 나왔다[2]. 칭찬에 주목하는 대신, 여기서는 현재 진행(중)과 현재 완료의 시제에서 그 의미를 고찰하고 싶다. 현재 완료 의미에서 봤을 때, 이미 페인팅으로 결과물이 다 나온 상태를 보고 감상자는 그렇게 판단한다. 한편 현재 진행 중의 의미로 볼 때, 페인팅은 그려지는 중이라는 말이 된다. 필자는 후자에서 시작하여 다시 전자를 주목하고 싶다. 먼저 현재 진행 중인 페인팅이란 무엇일까. 이는 곧바로 페인팅을 페인팅으로 보여주는, 페인팅의 형성 과정에 대한 관점이 된다. 물론 이는 작가의 라이브 드로잉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서 전시장에 작가가 없는 점은 물론, 설령 작가가 있다고 해도 그림을 막 그리는 중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페인팅은 어떻게 현재 진행 중이 될까. 작가의 수행 경험이나 감상자의 현재적 경험에 무게가 놓이는 것과 달리, 무엇에서 무엇으로 번역되는, 바로 재료(물감, 형태)에서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이행 과정(결과적으로는 표상)이 화면 위에서 전개될 때, 페인팅은 현재 진행 중인 양태를 보여준다. 그 아무것도 아닌 형태가 형상을 띠어 어떤 대상이 될 때, 그 과정에서 페인팅은 진행중의 성격을 띤다. 우리는 작품 속에 그려진 작업실 공간을 비롯해서 어떤 대상이 되는 전 단계의 형태를 목격한다. 이 형태는 날것으로 표현되는데 <나비 모드>에서 팔레트 위의 물감, <노란 얼굴>에서 점토 같은 덩어리로 묘사된다[3]. 날것은 이처럼 어떤 대상이기 전단계, 어떤 대상을 가리키기 전 단계에 위치하는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우리는 그 형태 역시 어떤 재현된 대상이라는 사실에 직면한다. <나비 모드>에서 물감은 화면에서 물감 이상의 것이 되는데, 역설적으로 이는 화면 안에 물감의 재현으로서 그려진다. 우리가 보기에 팔레트 위의 물감은 물감 자체로 현현하면서도 물감을 재현한 것이 된다.

 

 날것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재료적 속성으로 회귀하는 대신 이미지의 층위에서 다뤄진다. 물감으로 현현-재현한 그림 속의 물감은 재료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재현의 층위에 진입한다. 이미지의 층위에서 재현-현현의 관계는 물감만 해당되지 않는다. 화면에 그려진 또 다른 화면(들) 또한 그렇다. <여섯 나방과 티모>나 <나비 모드>, <땅따먹기>, <나비 채집>에서 우리는 작품 속에서 다른 화면(들)을 보게 된다. 작품 속에서 이 화면(들)은 물감으로 재현된 것이면서 동시에, 아니 그 전부터 어떤 대상을 재현하(도록 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이 화면(들)은 물감의 현현-재현 관계와 반대 방향으로 시작하는, 즉 재현-현현 관계로 작동한다. 화면(들)은 어떤 대상인 체 하는 화면(들)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거울이나 스마트폰, 액자에 비친 이미지는 그것 자체가 실제 대상 아니면서도 시각적으로 그 대상 자체로서 전달 또는 전송된다. 따라서 작가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연결되기 쉬운 물감이나 형태, 덩어리=날것이라는 등식이 아니라, 이미지는 모든 것을 재현된 것으로, 바꿔 말해―거꾸로 돌아가 날것(바꿔 말해 원재료)으로 간주하는 점이다[4]. 그러므로 작품은 ‘그리는’ 즉 ‘그려가는 중’이라는 실시간적 수행(과정)―재료적 성격의 형태나 물감에서 어떤 대상으로 나아가는―보다는 화면들에 ‘그려진’ 즉 시각적으로 모방/시뮬레이팅되어 ‘이미 옮겨진 것’에서 시작하는 역행 과정의 측면에서 봤을 때 비로소 ‘페인팅을 한다-하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의 층위는 어떤 대상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의 결과이다. 이는 (물감이나 형태의 재료적) 재현-현현 또는 (화면들의) 현현-재현의 관계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작가가 작품에서 중심적으로 다루는 불-빛 또한 마찬가지다. 불-빛은 극단적으로 모든 것을 날것으로 만든다. 불-빛은 그 자체로 형태를 소유하면서 동시에 모양을 바꾸고 대상에 스며들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대상을 전달하여 보여주는 조건이자 동시에 대상을 잠식하여 불-빛처럼 추상화한다. 대상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조건이자 동시에 대상을 침범하는 불-빛은 모든 것을 한낱-덩어리로도 지속되는-인상으로도 만든다. 불-빛을 받을 때, 형태나 색감과 어떤 대상은 모습을 변할 수 있다. <Flash>에서 조명 빛을 받은 얼굴은 순간 색면으로 변한다. 한편 <번개를 잡은 사람>에서 번개를 손에 잡을 수는 없지만 순간적으로 기록된 모양은 손에 움켜잡을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다[5]. 불-빛 아래에서 이미지의 더 넓은 층위는 모든 것을 이미지로 만드는, 즉 시각적으로 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시뮬레이팅하고 재현하고 추상화한다. 박지혜의 작품은 불-빛 아래 이미지의 층위에서 날것에 형태를 부여해서 어떤 대상으로 만드는 힘과 언제든지 날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힘이 공존하는 점을 포착준다. 이 두 가지 힘이야 말로 근원적인 이미지의 생생함, 이미지로부터 전개되는 생생함이다. 재료적 속성으로 귀결되는 날것이나 포착된 대상화의 어느 한쪽 아닌, 페인팅의 형성과정을 현재 진행중과 현재 완료의 시제에서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이미지의 생생함 속에서 근원적으로 만들어지는 날것을 감지할 수 있다. (2021.9)

 

 

[1] 일본어의 ‘やっている’에 해당되는 이 문장은 문맥에 따라 ‘한다’의 상태와 ‘하고 있다’의 의미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페인팅이라는 주어가 나왔을 때, 구분은 모호해진다.

[2] 전시장에서 나눈 이야기나 SNS 계정에서 찾아본 반응에 찾아볼 수 있었다. 会場での観客と交わした内容や、SNS上の反応から。

[3] 지난 전시 «전기장판 마니아»에서 소개된 <야외스케치>(2019) 마찬가지로. 前回の個展『電気カーペットマニア』の出展作「野外スケッチ」(2019)なども、同様に。

[4] 이는 지난 개인전과 같은 제목인 작품 <그림수거>(2019)와도 연결된다. これは先の個展と同名のタイトルでもある『絵の回収』にも当てはまる。

[5] «전기장판 마니아»에 소개된 <난로왕>(2019), <ROOM>(2019)의 부채꼴 모양 또한 마찬가지로. 『ホットカーペットマニア』の出展作でもある「ヒーターの王」(2019)や「ROOM」(2019)の扇状の光も同様に。

 

イメージの生き生きとした様態*:あらゆるものが生のもの**として送り出されるとき

パク・ジヘ個展«Lepidoptera»(2021.7.9-8.8, FINCH ARTS)

 

紺野優希

 

パク・ジヘの個展«Lepidoptera»を訪れた観客から、「真面目に絵をやっている」という感想が聞けた[1]。ここでは褒め言葉の代わりに、「絵をやっている」という表現の現在進行形と現在完了形の時制に注目したい。現在完了の意味で、絵画は鑑賞者に完結した状態として判断される。他方、現在進行中の意味では、ペインティングは描かれている途中と判断される。筆者は後者を先に考察し、その後改めて前者に注目してみたい。では、現在進行中の絵画とはなにか。それは、絵画を絵画[=ペインティング]として見せるという点で、絵画の形成過程の観点から考えられる。だからといって、それはアーティストによるライブ・ドローイングを指す訳ではない。本展では会場にアーティストが在廊できず、また仮に在廊していたとしても、展示中の絵をその場で描き続けていることはなかっただろう。

 

だとすれば、絵画は如何にして現在進行中となるのか。それは、アーティストによる遂行的な・パフォーマティブな経験や鑑賞者の現在的経験に重点が置かれるのとは別ものである。あるものがあるものに翻訳される、つまり材料(絵具、形)がある対象を指し示す移行過程(結果的には、表象)を経て画面上に展開される際に、絵画は現在進行中の様態を示す。何でもない形が形状を成し、ある対象になる。絵画はその過程で、進行中の性格を帯びる。鑑賞者は作中に描かれたアトリエをはじめ、ある対象となる前の段階の形――生のもの[原材料]として現れる――を目の当たりにする。「蝶のモード」ではパレット上の絵具、「黄色い顔」では粘土のような塊として描かれる生のものは、ある対象となる前段階、その対象を指し示す前段階に置かれた形態といえるだろう[2]。ところがその形態もまた、ある再現された対象であるという事実に直面する。「蝶のモード」で絵具は、画面上で絵具以上のものとして、画面の中に絵具の再現として逆説的に描かれる。見ると、パレット上の絵具は絵具そのものとして顕現しながらも同時に、絵具を再現したものとして表れる。

 

パク・ジヘの作品は、生のものを材料的属性に回帰する代わりに、イメージという段階で扱っている。絵具として顕現し・再現された作中の絵具は、材料という事実を否定することなく、再現の段階へ同時に進展する。イメージの段階において再現・顕現の関係は、絵具だけでなく作中に描かれたもう一つの(複数存在する)画面も同様である。「6匹の蛾とティモ」や「蝶のモード」、「陣取りゲーム」、「蝶の採集」には、(複数存在する)他の画面が画中に存在している。作品の中で、この(複数存在する)画面は、絵具で再現されたものでありながらも同時に、いやその前段階から、ある対象を再現する(再現するための)媒介役割となる。(複数存在する)画面は、絵具の顕現 - 再現の関係と反対方向の、つまり再現 - 顕現の関係として働く。作中の画面は、ある対象のふりをして[キャンバスを含む]画面に・画面として表れる。一般的に鏡やスマートフォン、額に映るイメージは、それ自体が実際の対象ではないが、対象そのものとして視覚的に伝えられ、転送される。したがってアーティストの作品において重要なのは、一般的な意味で結び付けられやすい「絵具や形、塊=生のもの」の等式ではなく、イメージはあらゆるものを再現したものとして、言い換えればーー翻って、あらゆるものを生のもの[原材料]とみなす点である[3]。したがって作品は、「描く」すなわち「描いている真っ只中」というリアルタイムな遂行(過程)――材料的な性質の形態や絵具からある対象に進展するーーではなく、[キャンバスや鏡、スマートフォンという]画面に「描かれた」、つまり視覚的に模倣/シミュレーションされ、「すでに移送されたもの」からはじまる逆行過程を介してこそ、「絵ををやっている」と言うことができる。

 

イメージの段階とは、ある対象を視覚的に伝達する過程の結果である。それは(絵具や形態の/による材料的)再現 - 顕現、あるいは(複数の画面への/としての)顕現 - 再現の関係だけでなく、最終的にアーティストが作品で中心的に扱う火 - 光***にも当てはまる。火 - 光は究極的にあらゆるものを生のものにしてしまう。火 - 光は、形のないものでありながらも輪郭を伴い、形を変え、対象に溶け込む。それだけでなく、可視化し伝達する条件でありながらも、侵食することで対象を火 - 光のように抽象化する。対象を視覚的に表す条件であると同時に、対象を侵食する火 - 光は、すべてを「薄っぺらい(/)塊」に、「継続的に保たれる(/)印象」に変える力も備えている。火 - 光を浴びると、型や色、そして対象は姿を変える。 「Flash」でフラッシュを受けた顔は一瞬で色面に変わる。一方、「雷を掴む人」では、雷を手に取ることは不可能だが、瞬間的に残され・記録され[象られ]た形は、今にも手で掴めそうなまでに具体的だ[4]。火 - 光は、あらゆるものをイメージに変えてしまう。つまり、[ある対象を]視覚的に見えるようにするだけでなくシミュレーション=再現し、抽象化する。パク・ジヘの作品は、火 - 光の下のイメージの段階において、生のものに形態を与えてある対象を作り出す力と、生のものにいつでも仕立て上げる力が共存する点を捉えている。この二つの力こそ、根源的なイメージの生き生きとした様態、イメージから展開される生き生きとした様態だ。材料的な属性に帰結する生のものや、捉えられた・捕らえられた対象のどちらか一方ではなく、絵画の形成過程を現在進行中・現在完了の時制として捉えることで、より根源的に作り出される生のものをイメージの生き生きとした様態から感知できるだろう。(2021.9)

 

 

*生き生きとした様子(생생함):真新しさや新しさとも言い換えられるかもしれないが、ここではヴァイタリティに近いニュアンスとして用いている。光を浴びることで対象の物質性が失われたり、モニターに映し出された映像が動きを伴っていることは、イメージという段階にて火 - 光を介して翻訳され変貌した結果として、両者共に生き生きとしている。

 

**生のもの(날것):加工されていないものという意味で、絵具や色彩や形態のような原材料とも言い換えられる。だが、本文にもあるように、イメージにおいて、あらゆるものが再現における原材料と化すという点で、ここでは生のものと訳した。物質的な側面と表象の関係については、ノ・ウンジュ(노은주)のペインティングにも当てはまる。ノ・ウンジュのペインティングについては拙稿を参照。콘노 유키 「이미지 세우기―수평적으로 열어 놓기: 노은주 개인전 《Walking―Aside》」(https://eunjoorho.com/text-_-2)

 

***火 - 光:本展に寄せたステートメントにも書いたように、韓国語で火と光は共に「(プル)」と言う(例:電気をつける=불을 켜다、火が燃える=불이 타다)。

[1] 会場での観客と交わした内容や、SNS上の反応から。 [2]前回の個展『ホットカーペットマニア』の出展作「野外スケッチ」(2019)なども同様。 [3] これは先の個展と同名のタイトルでもある作品「絵の回収」にも当てはまる。 [4] 『ホットカーペットマニア』の出展作でもある「ヒーターの王」(2019)や「ROOM」(2019)の扇状の光も同様に。

‘불’의 관계망이라는 소용돌이(번역본)

 

콘노 유키(紺野優希)

 

 ‘불’이라는 한국어가 있다. 이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불’과 ‘전기’라는 뜻이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 대화의 내용에 따라 각각 불이나 전기를 가리킨다. 일본어로 굳이 말하자면, ‘불’은 빛(明かり) 또는 불빛(灯り)일 것이다. 그러나 주위를 밝게 비추는 ‘행위’를 가리키는 일본어와 비교했을 때, 한국어의 ‘불’은 원소적인 것끼리 뜻이 중복되어 ‘빛 · 불빛’으로 번역하는 것보다 재미있는 의미의 조합이다 ―불은 전기가 되기도, 전기가 불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박지혜의 작품을 처음 본 곳은 «PACK2019 : 모험! 더블 크로스»(탈영역우정국, 2019)라는 기획전이었다. 큐브 모양의 쇼케이스에 작품을 전시하는 이 기획에서 작가는 인물과 새의 모습을 만든 오브제를 전시했다. 형광색의 아크릴 물감과 털실을 사용하여 제작된 오브제는 큐브에 내장된 조명을 받아 색채감이 더욱 두드러졌다. 이듬해에는 개인전 «전기장판 마니아»(갤러리밈, 2020)가 열렸다. 전시에 소개된 작품은 전기장판을 비롯해 전자 제품과 함께 사는 미술가의 일상을 그린 페인팅이었다. 스마트 폰의 조명과 전기난로의 빛은 부채꼴이나 띠 모양이 되어 인물이나 작업실의 풍경에 겹쳤다. 큐브 내부의 조명은 화이트 큐브의 조명으로 바뀌었지만, 작품의 색채감은 상실되지 않았다. 인공적인 빛은 캔버스라는 화면에 색채감과 함께 시각화되고, 명확하게 그어진 경계선과 윤곽, 그리고 색채의 배치를 통해서 화면 전체에 색채감의 강약을 부여한다.
 

 두 전시에서 색채감은 작품 외부에서 받는 빛과 작품 속에 그려진 빛의 묘사를 통해 보는 사람들에게 생생한 인상을 가져다준다. 박지혜의 작품에서 ‘빛’은 생활 속에서 느끼는 빛과 이를 캔버스에 그린 것, 더 나아가 작품이 전시되는 환경이라는 서로 다른 공간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특징은 이번 개인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전 «Lepidoptera»은 빛뿐만 아니라 빛을 만드는 원인인 불(<꺼지지 않는 불>)과 전기 (<Flash>와 <번개를 잡은 사람>), 더 나아가 이들이 영향을 주는 주변까지 관계가 전개된다. 이를 앞서 말한 ‘불’의 관계망이라고 할 수 있다 - 번개와 태양의 자연광, 실내조명이나 스마트 폰 등의 인공조명, 이것들에 끌려 다가가는 나비와 나방, 그리고 사람들, 빛을 형상화하고 화면 속에서 빛이 되는 붓질, 이 모든 것들을 비추는 전시장.

 

 사계절이 거의 비슷한 한국에서 일본 전시장으로 온 작품을 보면 일본에 사는 우리 주변에서 요즘 자주 보는 광경이기도 하다. 전기장판의 계절과는 정반대의 시기에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 박지혜의 페인팅은 어떻게 사람들에게 손짓할까. 전시장에 날아다니는 나비와 나방, 실내와 실외, 낮과 밤의 풍경은 아크릴 물감과 유화 물감으로 만든 색채감과 화이트 큐브라는 공간에 설치된 인공조명에 의해 더욱더 빛날 것이다. 원소적인 불 · 전기라는 모티브가 색채라는 또 다른 원소적인 것을 통해 전시장에서 어떻게 빛날까. 그 ‘불’의 관계망이라는 소용돌이에 한 번 이끌려 보는 건 어떨까. (2021.7)

「불」の関係網の渦へ


紺野優希

 

 


 

「불(プル)」という韓国語がある。この単語には二つの意味があるのだが、「火」と「電気」という意味だ。同じ単語を使いながらも、会話によってそれぞれ火や電気を指したりする。強いて言うなら、「불」は日本語の「明かり・灯り」だろう。しかし、周りを明るくする行為ではなく、元素的なものに意味が重なっている点で、「明かり・灯り」と訳す以上に面白い意味合いとなっている――火は電気となり、電気はまた火にもなるからだ。


 

パク・ジヘの作品を初めて見たのは、『PACK2019:冒険!ダブルクロス』(Post Territory Ujeongguk/韓国ソウル、2019)という企画だった。キューブ状のショーケースに作品を陳列するこの企画で、パク・ジヘは人物と鳥を象ったオブジェを展示した。蛍光色のアクリル絵具と毛糸を使って制作されたオブジェは、キューブに内蔵された照明を受け、色彩感がより一層際立っていた。翌年には、個展『電気カーペット・マニア』(Gallery Meme/韓国ソウル、2020)が開催された。出展作は電気カーペットをはじめ、電化製品と共に暮らすアーティストの日常を描いたペインティングだった。スマートフォンのライトや電気ストーブの光は扇状や帯状となり、人物や作業場の風景に重ねられている。キューブの中の照明はホワイトキューブの照明に代わったが、色彩感が失われることはなかった。人工的な光はキャンバスという画面の中に色彩感を伴って視覚化され、はっきりと引かれた境界線・輪郭と配色によって、画面全体に渡って色彩感に強弱が与えられている。


 

二つの展示において色彩感は、作品の外から受ける光と、作品の内に描かれる光の描写の両者によって、活き活きとした印象を見る者に与える。パク・ジヘの作品において「光」は、生活の中で感じ取る光とそれをキャンバスに描いたもの、さらに作品の展示される環境という、異なる空間と結びつくことになる。そのような特徴は、今回の個展でも見て取れるだろう。『Lepidoptera』では、光だけでなく、その原因でもある火(<消えない炎>)と電気(<Flash>や<雷を掴んだ人>)、さらにはこれらがもたらす周りの関係までに展開している。それは冒頭に述べた「불」の関係網と言い換えられるだろう――雷や太陽といった自然光と、室内灯やスマートフォンなどの人工の光、それに引き寄せられる蝶や蛾と人間たち、光を象ったり画中で光となる筆遣い、それらを照らす展示会場。


 

四季が日本とほとんど重なる韓国から会場に運ばれたのは、私たちの身の周りで近頃よく見る光景でもある。電気カーペットの季節とは真逆の時期に開催される展示で、パク・ジヘのペインティングは、どのように人々を手招くのだろうか。会場で飛び交う蝶や蛾、室内と屋外、昼と夜の景色は、アクリル絵具と油絵具を用いた色彩感と、ホワイトキューブという空間に設置された人工の照明によって、煌きを増すだろう。元素的な火・電気というモチーフが、色彩というこれまた元素的なものによって、会場でどのように輝くのか。その「불」の関係網の渦に、一度引き寄せられてみてはいかがだろうか。(2021.7)

박지혜의 회화

 

참조물들의 회화와 창작의 알레고리

 

고충환(Kho, Chung-Hwan)

 

 

  이탈리아의 트랜스아방가르드, 프랑스의 자유구상, 독일의 신표현주의와 통독 이후 라이프치히화파, 영미권의 뉴페인팅, 그리고 일본의 재팬팝(혹은 마이크로팝)은 형상미술의 다른 차원을 열었고, 그렇게 열린 차원은 현재진행형이다. 저마다 지향하는 이념이며 형식은 각양각색이지만, 예술의 정의는 물론 형식과 방법론마저 특정할 수 있다는 모더니즘패러다임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제기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 관념과 실천논리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하나로 통한다. 일반화하기는 그렇지만, 대개 회화적 사실 혹은 현실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도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회화에 의해 열린 사실, 회화에 의해 제안된 현실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 내통하면서 여전히 현실에 근거하지만, 그럼에도 더 이상 현실 그대로를 재현하지도 현실에 한정되지도 않는다. 여전히 현실을 참조하지만(그러므로 어쩜 현대회화는 이런 참조물들의 회화로 정의할 수도 있을 것), 그럼에도 현실은 더 이상 회화적 현실의 준거가 되지 못한다. 그 관계는 역전되는데, 회화적 현실이 오히려 혹 간과했을지도 모를 현실, 억압적인 현실, 잠재적인 현실, 그러므로 어쩜 겉보기와는 다른 현실의 민낯을 드러내고 폭로하는 거울이 된다. 그 화법은 리얼리즘적이라기보다는 알레고리적이다. 참조하고 덧붙이면서, 우회적이고 에두르면서 실체를 파고든다. 그렇게 현대미술 특히 회화는 사적언어들의 각축장이 된다.

 국내에도 이런 작가들이 더러 있는 편이고, 박지혜 역시 그 경향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자기만의 독창적인 회화적 형식을 열어놓고 있다. 일러스트와 애니메이션, 웹툰과 만화(작가는 만화 세대고, 지금도 만화를 즐겨본다)와 같은 대중매체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하면서, 그렇게 흡수한 자양분(어쩜 참조물들)을 회화적 형식으로 부려놓는다. 사사로운 일상적 에피소드와 현실인식을, 순간적인 발상과 착상을, 혼미한 기억과 스쳐지나가는 생각을 믹서 시키면서 또 다른 현실, 어쩜 다중 복합적이고 중층화된 현실, 느슨한 현실에 가려진 긴박한 현실인식의 장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사고가 났다. 아스팔트 위에 현장보존과 사태수습을 위해 경찰이 스프레이로 그려놓은 그림이 선명한 걸로 보아 아마도 자동차에 사람이 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얼굴을 바닥을 향한 채 엎어져 있다. 그 곁을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 생각에 골몰하는 사람도 있다. 어딘가로 황급히 뛰어가는 커플이 있고, 그 와중에 키스하는 연인이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나무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고양이. 무슨 일인가를 목격한 것 같은, 얼굴에 피 칠갑을 한(?) 노랑머리 남자의 놀란 표정. 교통표지판과 경고등. 무의미한 패턴과 장식. 그리고 여기에 번쩍, 쿵, 슈욱 하는, 사건과 반응을 대신한 만화의 전형적인 표식들. 그리고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상황들.

 작가가 <출근길>에 목격한 장면들이다. 흔한 일이고 일어날 법한 일이다. 이 일 중 몇 장면은 실제로 저녁 뉴스 시간에 TV에 나올 것이다. 혹 누군가가 전송해온 SNS로 접한 정보일 수도 있겠고, 아님 그저 잡지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그 중에는 논리적 개연성이 있는 경우도 있고, 그저 우연한 장면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실제 유무를 따지는 것이나 일관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고 의미도 없다. 중요한 것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 마치 영화 스크린에서처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실제 현실이 되는 현실, 흡사 가상현실과도 같은 현실이 엄연한 현실로서 눈앞에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작가는 상황적으로 실제와 가상, 시간적으로 현재와 기억이 어떠한 경계도 없이 하나의 화면 속에 짜깁기되고 재구성되는 장면을 통해 현실의 축도를, 일상의 신풍속도를 그려 보인다.

 

 그렇게 편집되고 재구성된 현실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기법을 닮았다. 의식은 결코 순차적으로 흐르지도, 인과성을 따라 전개되지도 않는다. 의식은 다만 우연과 필연, 실제와 가상(아님 상상), 의식과 무의식이 끊임없이 상호 간섭하는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각들의 다발이며 무의미한(사실은 다만 무의미해 보일 뿐인)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을 부르고, 하나의 의식이 다른 의식을 불러들인다. 자동기술법이고 자유연상기법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면 그 생각과 생각, 의식과 의식 사이엔 어떤 논리적 개연성도 인과성도 없다. 그럼에도 현실이 간과하고 억압하고 은폐한 현실, 가히 집단체면 수준으로 부를 만큼 사람들의 의식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이미지의 정치학에 가려진 현실을 암시하고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그렇게 작가는 치열한 현실을 뚫고 작업실에 왔다. 작가에게 현실은 전쟁이고, 작업(워크그라운드)도 전쟁(배틀그라운드)이다. 마치 하나 달랑 남은 담배를 피울 것인가 아님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돛대). 그 순간에선 살 것인가 아님 죽을 것인가를 번민하는 햄릿의 비장감마저 감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창작의 포기>를 생각한다. 손을 잘라내고 싶고 발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낀다. 그리고 때로 자기연민에 사로잡힌다(내 슬픔을 봐). 그 와중에서도 작가에겐 연민을 나눌 친구가 있다. 그는 미술학원에서 조소수업을 위한 알바모델 일을 한다(조소 아르바이트). 그가 모델을 서고 있으면, 무슨 둥지로 착각을 했는지 비둘기가 머리에 날아와 앉는다. 혹 머리에 똥을 쌀지도 모를 일이라서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전전긍긍해 한다.

 

  작가에게 비둘기는 애증의 대상이다. 그것들은 마치 작가를 감시하는 불행의 사신 같다(스쿼드). 술 취해 널브러져 있으면 떼거리로 몰려와 구구 거리는데, 작가를 보호하려는 건지 아님 토한 걸 탐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구토의 숲). 그렇게 작가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포기와 재기를 오락가락하는데, 비둘기는 재기했을 때보다 포기했을 때면 어김없이 확인이라도 하는 양 곁을 지킨다. 이를테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장대비를 뚫고 그림을 잔뜩 실은 리어카를 끌고 보이지도 않는 길을 무작정 갈 때면 비둘기가 짐 위에 앉아 작가를 지켜본다(그림수거). 사실 새 눈은 얼핏 봐서 어디를 쳐다보는지, 뭘 보기나 하는 건지 잘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희한하게도 몸을 앞으로 쑥 내민 것이 영락없이 작가를 쳐다보는 것 같다. 작가를 향한 비둘기의 연민이 엿보이고, 비둘기에 대한 작가의 연민이 읽힌다. 개인적으로 연민이 예술가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이런 연민이 상호교감을 자아내고 공감을 얻는다.

 

 여기서 비둘기는 사실 작가의 분신이다. 작가의 불행을 감시하는 비둘기도 작가를 연민하는 비둘기도 모두 알고 보면 작가의 내면에서 불러낸 자신의 화신이다. 근육잉어(마치 근육을 키워야 해! 씩씩해 져야 해!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같은)도, 고양이 레오도 그렇다. 이런 분신이며 화신도 그렇지만, 작가의 모든 그림은 알레고리다. 혹은 알레고리적이다. 현실 속에서라면 비둘기가 머리 위에 내려 앉아 똥을 싸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가 않는다. 창작을 포기한다고 해서 손이나 발이 떨어져 나가지도 않는다. 더욱이 폭풍우를 뚫고 무슨 행상인처럼 그림을 리어카로 실어 나를 일도 없다. 창작의 알레고리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포기와 재기를 반복하고 번복하는 예술가의 태도에 대한 알레고리고, 번민의 알레고리다. 그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라기보다는 예술이 뭔지, 예술의 죽음이 공공연한 현실로 운운되는(그리고 예술이 자본에 잠식당한) 시대에 새삼 창작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묻는 자기강박의 알레고리다.

연민이 창작주체의 덕목이라면, 강박은 예술을 움직이는 힘이다. 작가는 그 덕목과 동력 모두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형식적으로 일러스트와 애니메이션, 웹툰과 만화의 회화적 성과를 자기화하면서, 그리고 여기에 현란한 원색 사용과 대비에 거침이 없는 현저하게 현대적인 색채감정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독창적인 회화적 형식을 얻고 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 특히 창작현실에 연유한 사사로운 일상적 에피소드와 현실인식을, 순간적인 발상과 착상을, 기억과 생각을 날실과 씨실 삼아 하나로 직조하면서 자기만의 서사를 짓는다. 그렇게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현실에 가려진 현실, 때로 웃기지도 않은 현실(그러므로 해학적인 현실), 어쩜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의 비전을 열어놓는다. (2019.4)

Paintings by Ji Hye Park

<Painting of References and Allegory of Creation>

Chung-Hwan, Kho

 

  Transavantgarde of Italy, Figuration Libre ("Free Figuration") of France, Neo-Expressionism of Germany, Leipzig School(“Leipziger Schule”) after unification of Germany, New Painting of Britain and the United States, and Japanese Pop Art(alias “Micropop”) opened a new dimension for figurative art, and it is still ongoing today. Every ideology and its form is unique and diverse on its own, but they all come together as one in a sense that an anti-thesis for a definition of art and structure and methodology can be specified through modernism paradigm, in the notion of modernism art and practical logic. It is difficult to generalize, but a fact based on a painting or sharing thoughts on reality share a common thread as well. A fact revealed by painting shares a sense of reality through painting. An intrigue with reality but still based on reality; however the painting does not reconstruct reality or is restricted by it. It still refers to reality (therefore contemporary paintings may be defined by these references) but the reality does not become a foundation for reality in painting. The relationship becomes reversed when the pictorial reality depicts underestimated, suppressed, and potential reality, which becomes an exposing mirror to strip the bare face of reality. The language is allegorical rather than being closer to realism. Referencing and editing, it is indirect and oblique but penetrates into its core value. The contemporary art, especially painting becomes an arena of competition for private languages. 

  There are some artists in Korea with a similar disposition, and Ji Hye Park also belongs to the group. However, she adds her distinctive painting style to her work. She absorbs nourishment from mass media such as illustration, animation, online comic and cartoon (the artist is a cartoon generation, and still enjoys it today), she spreads her nourishments (perhaps references) in a painterly way. Tedious daily episodes, recognition of reality, momentary ideas and inspirations, faint memories mixed with a stream of thoughts passing by facing another reality, a reality which is multi-dimensional and much more complex, revealing an opening for an urgent realization of reality masked by leisure reality.

 

 

  An accident occurs. The spray paint drawn by the police is still fresh and by the look of it, it looks like a man was hit by a car. A person laid flat facing bottom. The people absentmindedly pass by, and some are caught up in their own thoughts. A couple runs toward somewhere, and meanwhile, another couple is kissing. A cat is glancing from behind a tree. A yellow-headed man with blood smeared on his face looks startled as if he witnessed something. Traffic sign and warning light. Meaningless pattern and decoration. Here, the artist added flash, thud, whisking indications typical of event and action used for a cartoon. Strange people and situations. These are scenes the artist witnessed through her <Way to Work>. It is a mundane and likely event to occur. Some of the events will actually be broadcasted on the evening news on TV. Some might encounter the news through social media, or it could be an image that came up while flipping through a magazine. Some have logical probability, or it is just a random scene. There is no use discussing the reality of it or requesting any consistency, and it is meaningless. What is important is that reality is much closer to a movie, to a novel, and all things imaginable on movie screen becomes a reality itself, which is a reality close to virtual reality unwrapped and played before us. The artist shows the reality and virtual reality, present and memory without any boundaries within a screen and shows edited and restructured scenes, which is a miniature of reality, and a new genre painting of everyday life.

 

 

  The edited and restructured reality resembles a stream of consciousness of Marcel Proust. The consciousness never runs in chronological order nor does it follow an order of cause and effect. The consciousness is coincidence and inevitability, reality and virtual reality (or imagination), consciousness and unconsciousness constantly interact and interfere with inevitable and indiscretion bundles of thought, and meaningless (looking meaningless in reality) small portions. A stream of thought brings another thought, and a consciousness brings another consciousness. It is automatisme and free association technique. Unless it is from a macro perspective, there is no logical connection and cause and effect between thought and thought and consciousness between consciousness. However, the reality overlooks, suppress and conceal reality, and dull people’s consciousness till the point of group hypnotism, reflecting and inferring reality.

 

 

  The artist endured fierce reality to come to her studio. The reality is a war for the artist, and her work (work ground) is a battle (battleground). It is a crucial moment just like when you have to decide whether to smoke the last cigarette or give up on it (last cigarette). There is a sense of heroism of Hamlet contemplating whether to live or die. A couple of times during the day, the artist thinks of <Giving up Creation>. She wants to chop off her hands and feels her feet falling off. Sometimes she falls into self-pity (look at my sadness). Meanwhile, the artist has a friend to share sympathy. He works as a part-time model for art academy (part-time sculpture). A pigeon comes by to sit on him when he models; mistakenly thinking it is some sort of a nest. He feels sweaty and anxious in fear that the bird might make a mistake on his head.

A pigeon is an object of love and hatred. They are like the grim reaper of misfortune overlooking the artist (squad). When the artist is drunk and sprawled across the floor, they all come around cooing, but it’s unsure whether it wants to protect the artist or attempts to go for the vomit (forest of vomit). The artist wavers between giving up and making a breakthrough more than twelve times a day, and the pigeon particularly stands by when he gives up rather than making a breakthrough to check. For example, when it’s raining cats and dogs, the artist pulls the handcart full of painting and continues the path unknown, and the pigeon stands on the top watching the artist (collecting paintings). To be honest, it is difficult to tell where the bird is looking at, or what it is looking at. However, the protruding body seems to stare directly at the artist. The pigeon’s sympathy towards the artist is evident, and the artist has sympathy towards the pigeon vice versa. Personally, I believe sentiment is a personal virtue of an artist, and sentiment present in the artist’s painting brings out mutual interaction and empathy of the audience.

   The pigeon is actually an alter ego of the artist. The pigeon watching over the misfortune of the artist and empathizing is all an embodiment of self from inner side of the artist. It is applicable for the Muscle Carp (as if to tell yourself you must build muscle! You must be strong!), and cat Leo. These alter ego and embodiment, along with all the paintings by the artist is allegory or allegorical. In reality, the pigeon would never land on top of human head and leave droppings. Your hands or feet will not fall off even if you gave up creation. Moreover, you do not have to carry painting by handcart through a vicious storm. These are all allegory of creation. It is an allegory of the artist who repeats and reverses giving up and retries twelve times a day, and an allegory of torment. It is not the anxiety of the unknown, but about what art is, and an era where the death of art often mentioned as true reality (and art taken over by capital) an allegory asking self-obsessed questions about the meaning of creation.

 

  If sympathy could be a virtue of the subject of creation, compulsion is the power to move art. The artist possesses both virtue and motivation. The artist formally introjects painterly success of illustration, animation, online comic and cartoon, and use vibrant original colors and contemporary color with a stark contrast to create a unique stylistic form. The content shows small episodes from daily life based on virtual reality; momentary idea and inspirations, memories and thoughts weaved into warp and weft into one, creating an epic of its own. These weaved stories reveal truth masked by reality, reality not so humorous (therefore witty reality), perhaps reality more extreme than reality. (2019.4)

박지혜의 우울과 상실의 초상화

 

  (Park Oksaeng)박옥생


 

1. 일상 읽기

 

 

  박지혜는 인간의 실존적인 삶의 모습들을 관찰한다.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인간 삶의 모습들을 작가는 마치 기자가 사건의 전황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처럼, 기사를 쓰듯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스냅사진의 잘 짜여진 구도와 같은 일상의 다시 읽기 작업에는 작가가 주인공이 되거나 작가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가족과 친구들은 하나의 스토리를 갖는 주인공이 된다. 작가의 화면들에는 인물과 풍경이 연극의 무대를 보는 듯 특정한 행위가 벌어지는 상황의 묘사가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의 인물들에게는 표정이 없다. 공허하고 우울한 현대인들의 슬픔들이 화면 가득 부유하고 산란하고 있다.

 

  작가가 읽어내는 현대 인간의 삶은 단편적이고 현실 자체를 뛰어넘는 정신적으로 승화되거나 강조된 풍경으로 다가온다. 근작에 보여주는 <꿈의 장면>, <목욕탕>,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날>과 같은 작품들은 핑크의 사용이 강조된 인물들과 나무, 풍경의 묘사는 인간 내면의 불안과 우울을 끄집어내기 위한 표현적 수단으로 보여진다. 화면을 분절시키고 구획시킴으로써, 그 사이에 습합되거나 남아있는 색 조각들의 편린들은 이 공간이 기억의 공간이거나 가상의 공간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 박지혜의 화면은 색선과 색면의 조각 맞춤에서 그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다. 마치 색의 조화와 범주를 실험하고 증명하고 있듯이, 색들은 다양한 명도와 채도의 간극을 드러내고 숨기고 가려지고 다시 덧칠해 지고 있다. 이들의 조합들에서 시뮤레이트 된 가상공간에서 경험하게 되는 색의 강조나 픽셀의 조합과 같은 흔적들을 경험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는 현실과 가상이 서로 침범하고 교합되어 시,공간이 교차되는 낯설고 이질적인 풍경을 보여주게 된다. 작가의 경험에서 출발한 외부세계의 단상들이 내밀한 내부세계로 침투함으로써 겪게 되는 인간 정신을 닮은 실존의 색이며 풍경인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화면은 70년대 이후 일었던 독일의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 新表現主義)의 일련선상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요르그 임멘도르프(Jorg Immendorff) 나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와 같은 이들 신표현주의자들은 인간현실에 관한 연약하고 모호한 인간 감정을 보여주며 도시사회의 현상들을 거칠지만 선명하고 명료한 색의 배열들로 구성한다. 도시 사회의 인간 단상들을 거칠고 분명하게 또는 우화적인 연극성을 동반한 작가의 작품에는 신표현주의의 특징들을 읽어 낼 수 있다.

작가가 강조하고 있는 강화되고 자유로운 분명한 색의 흔적들을 통해 인간 풍경들에 머무른 작가의 시선의 시점과 풍경에 닿은 뜨거운 응시의 감성이 사물들에 들러붙어 있음을 알게 된다. 외부 풍경에 맟닿은 작가의 내밀한 시선이 살아있는 유기체의 순간과 흐름으로 변환되고 있다. 그리고 드러나는 것은 극화(劇化)된 일상 속에 존재하는 인간 실존의 표정과, 음미되어 정화된 따뜻한 색의 온도로서 유기적으로 꿈을 꾸듯 사유하는 색 면의 공간이다.

 


 

2. 이방인에 관한 성찰(省察)

 

 

  작가의 화면에는 물질문명 속에서 소외된 인간에 관한 문학성이 강조된 이야기들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습관처럼 살아간다. 이러한 일상 속에서 문득 자신을 성찰할 때  우리는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우울하고 공허하고 슬픈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부조리한 실존적 존재인 인간 자체에 관하여 고민할 수밖에 없다. 유한의 죽음은 우리를 다시 내면으로 응시하게 되고 삶의 의미들을 재고하게 된다.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 <이방인>은 뫼르소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부조리한 인간 삶의 실존적 단상을 보여주고 있다. 양로원으로부터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통보를 받았음에도 죽음에 관한 현실적 슬픔보다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읖조리는 뫼르소는 공허하고 우울한 현대인의 감정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 낯설고 슬픈 인간 군상들의 표정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까뮈가 보여주는 주인공이 겪는 감정의 궤적들은 박지혜가 그리고 있는 불안, 행복, 일상, 가족, 자신의 모습들과 닮아 있다. 이는 모두 유한한 실존적 존재로서의 이방인에 관한 쓸쓸한 이야기들인 것이다. 고뇌하는 젊은 작가의 시선에 닿은 외부 세계는 다시 자신의 내부와 교류되고 있다. 그의 조형과 색이 공간과 시간의 교차로써 교류되는 것처럼, 작가의 시선과 사유는 내밀한 안과 외부의 감정과 정서들로 교차되고 있다. 이는 작가가 주목한 인간 부조리의 상황 그 자체가 객체로써 인식되고 다시 주체로서의 작가에게로 환원되고 재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낯선 이방인으로서의 객체, 타자를 그대로 직시하고 그 상황과 존재 가치를 긍정하고 절대적인 가치평가를 보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나의 상황과 나의 내면으로 끌고 들어와 그 의미를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가 말하고 있는 타자의 존재로써 주체가 존재하고, 타자가 관계함으로써 주체가 성립되는 안과 밖의 유기적인 관계와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작가에게 있어 타자로서의 환경과 외부의 삶은 거울과 같이 작가의 시선을 반추하고 투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작가 자신으로 향하는 성찰과, 유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대면하게 하는 비밀의 빗장과 같은 것으로 작용한다.

 

  이는 박지혜의 작품이 동시대미술이 고민하고 있는 조형의 문제, 내용의 문제 그리고 전기론적인 작가의 경험과 삶의 내용이 작품과의 관계설정에 유기적인 영향과 침투를 보여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작가가 삶에 관한 성숙된 응시와 성찰이 얻은 결과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품은 거칠지만 힘찬 색의 운용과 감동의 파장이 긴 문학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현대물질 문화 속에서 생명이라는 유기적인 인간의 실존성에 관한 고민과 성찰의 변주들을 앞으로 기대하고 싶다. (2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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